[짧은생각] 작은 것에 감사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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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흐름과는 상관 없지만 팀원 모두가 너무 이쁘게 나와서 첨부합니다.^^ >저희가 활동하고 있는 이곳 호치민 YMCA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에게 즐거운 웃음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해 주시는 ‘꼬남’이라는 베트남 최고의 요리사(전적으로 저의 생각입니다^^)와 많은 직원들, 그리고 YMCA 2층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친구들과 있었던 짧은 하루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치민 YMCA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맛있게 먹은 후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잠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다른 몇 몇의 남자들과 이곳의 대중놀이인 da cao(한국의 제기차기와 비슷한 놀이) 를 함께 하고, 많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전부터 저와 스캔들이 조심스레 일고있는 이잉 과 봉제학원의 실세인 것으로 판단되는 화와 함께 che(한국의 팥빙수와 비슷함)를 먹으러 가자며 자신들이 사주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과 그동안 배운 베트남어를 사용하며 시간을 보내며 그 둘을 기다렸고, che 를 먹기 위해 함께 YMCA를 나섰습니다.저희는 이것저것 하루일과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베트남어에 한해서 정말 한정된 언어로 서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대충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고, 어떠한 의미인지는 파악이 되기에 더불어 웃고 함께 재잘거립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che 를 시켜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습니다. Tai sao khong di hoc? ( 왜 학교에 가지않아? )그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대답합니다.Khong co tien. ( 돈이 없어서 )현재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15세~24세로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지금 마땅히 학교에 다녀할 친구들이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제 주머니를 뒤져 보았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보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지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얼굴에 웃음은 그들보다 훨씬 적고,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그들보다 훨씬 얕았음을 느꼈습니다.다시금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진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을 자꾸 느낍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굉장히 시끄러운 상황이라고 인터넷을 통하여 접해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저 또한 현재 대학교 4학년에 진학예정인 상황에서 좀 더 좋은 직장, 좋은 연봉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제 모습이 한없이 초라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잠시 화장실 다녀온다고 이야기 한 후 카운터에서 저희가 먹은 che 값을 계산하였습니다. 제가 계산한 것을 알고는 처음에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좋아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졌다가 이럴 때 쓰라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 짧은 시간동안 그들의 웃음과 생각.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 물질에 매여있는 저의 모습이 점차 깨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달 넘게 아무런 활동도 없이 호치민 YMCA에서 베트남어만 배우고 있던 저에게 제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하나씩 깨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 베트남에서 생활이 더욱더 기대가 되고, 과연 4개월 후 제가 어떤 고민거리들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까 궁금증이 더해가는 하루 였던 것 같습니다.
[Xin chao VN] 베트남에 오시면은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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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 오시면은요~ 전쟁박물관 어느 나라든 전쟁을 겪었다면, 이기든 지든 스스로에게 많은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불과 몇 분 전에 내 눈앞에서 해맑게 웃던 가족들이 한순간의 재로 사라지는 시간이 바로 전쟁의 시간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전쟁을 베트남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베트남 역사를 잘 살펴보면 역사의 반은 침략이고 나머지 반은 거의 전쟁입니다.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열서 베트남에 대해 조사를 할 당시 베트남 내에서 발발 했던 전쟁은 우리를 놀라게 할 만큼 많고 길었습니다. 대략, 30~40년은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 전쟁, 즉 베트남 전쟁도 사실 1차, 2차, 3차로 3번에 나누어서 전쟁을 했었고, 마지막 전쟁인 3차 베트남 전쟁이 1981년에 끝났으니까 꽤 최근까지 전쟁을 했었습니다. 전쟁박물관은 이러한 전쟁의 역사와 무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규모는 생각보다 작지만, 그 안은 상당히 알차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밖에는 탱크와 비행기가 있고요. 안에는 무기들 소개와 함께 베트공들의 활약상을 담은 사진과 학살이나 사람들의 사체 사진 등 상당히 생생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찾아가기가 수월하고요. 자국인에게는 돈을 안 받아서 좀 더 자유롭게 이용 할 수 있는 듯싶습니다. 아마도 베트남 사람들은 이 곳을 통해서 자신의 역사와도 다를 바 없는 전쟁을 좀 더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 가지 테마가 있는데요. 굳이 다 말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밖의 탱크나 비행기는 우리 또한 자주 봐오던 것들이라서 그렇게 관심을 끌진 않았고요. 안의 사진은 약간 잔인(?)하달까요? 너무 생생하게 담겨져 있어서 비위 약한 저는 오래 있지 못 했습니다. 그 밖에 전쟁의 흐름, 쓰여진 포탄의 양 따위를 그래프로 나타난 방도 있었는데요. 재미없었습니다. 제 관심을 끌던 방은 적게는 9살에서 많게는 15살 정도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된 방입니다. 사진들이 너무 강한 인상을 남겨서 약간은 뭍혀지는 듯한 느낌을 받긴 했는데요. 저 처럼 약간 예외의 사람들이 그 쪽을 먼저 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냥 단순한 그림 전시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베트남 아이들의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담은 단순한 그림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제 오만이더라고요. 이 아이들은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간단한 질물은 하나 할까해요. 만약에 당신이라면 전쟁에 대한 그림을 그리라고 했을 때 무엇을 그리시겠어요? 전쟁을 모르는 우리로써는 전쟁을 그리라고 하면 단순히 탱크나 비행기가 싸우는 것을 연상하기가 쉬울 거 같아요. 물론 비둘기 한 마리 그려 놓고 평화를 외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마치 자기가 군인이라도 된 것 마냥 앞장서서 적을 때려 눞히는 그림을 그릴 것 같기도 하네요. 아직 우리는 인종을 뛰어넘은 평화를 쉬이 생각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전쟁의 생생한 학살에 대해서는 생각치 못 할 것 같아요. 아직 어린 아이들이에요. 9살이면 초등학교 2학년이죠. 이 9살 아이의 그림은요. 피의 강에 죽은 사체들이 둥둥 떠있는 그림이에요. 누가 상상했을까요. 피의 강이라는 것 자체를 쉬이 떠올릴 수 있을 만한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한국에서 누가 그러한 그림을 그렸으면, 아마 애를 상담소에 보내고 정신과 진료를 받게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 만큼 우리가 사는 환경은 그러한 그림을 담아낼 수 있을 만한 환경은 아니니까요. 그 외에 'Please Don't'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15살이 그린 그림이에요. 저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전쟁이라는 것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라고 생각 했을까요? 아니면 단순히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담고 싶어 했을까요? 제가 작가가 아니라서 뭐가 옳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제가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곳에 아이들이 보는 것과 우리 한국에서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죠. - 그 외 갑자기 생각나네요.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책을 쓴 이스마엘(풀네임이 생각이 안나요.) 자신의 전쟁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담아 책으로 출간을 했습니다. 그 안에서 작가는 12살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전쟁이란는 상황 속에서 집도 없이 오직 자기가 살기 위한 삶을 살아 왔습니다. 어린나이에 총을 잡아야 했고, 어리 나이에 마약을 해야 했으며,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생활 해야 했습니다. 전쟁은 단순한 국가와 국가간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군인이든 아니든 누군가가 죽는 다면 그로인해 생기는 누군가의 슬픔은 누가 책임 져주나요?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아이라면 그 아이를 어떻게 보상을 해줄 것인가요? 아이가 가질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앞으로의 생활을 누가 책임져주나요? 이스마엘이 그랬어요. 자신이 살았던 환경과 다른 곳이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만약 이 시간 전쟁터에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할까요? 자신은 총을 몸에 품고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삶을 살지만 지구 어딘가에는 편안히 잠자고 게임하고 놀고 쓸데 없는 반찬투정을 하는 아이가 있다고 알고는 있을까요?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아이의 행복을 우리가 어떻게 해서 정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을 압니다. 하지만 보통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합의 된 것들, 적어도 1달러 미만으로 사는 아이들이 좀 더 적었으면 좋겠고, 좀 더 가족의 품에서 행복한 웃음 띄며 살았으면 좋겠고, 좀 더 어린나이부터 일하기 보다는 좀 더 놀았으면 좋겠고, 그러한 바람들이 그러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싶네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은 곳에서 정말 활발히 진행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곳에서 사는 아이들은, 우리는 그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네요. 이스마엘 처럼 운일지 아니면 자신이 개척한 것일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전쟁이라는 곳에서 해방되어 살아가는 아이들이 당연히 있지만 정말 그렇지 못한 곳에서 사는 아이들은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인지 그 삶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에게는 아이다운 혹은 아이처럼 생활할 환경을 마련 해 주어도 그것을 힘들어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더운 봄 날씨에 우리를 찾아온 Duy에게 아직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 시간을 할애해서 우리에게 봉사를 해주는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시할 수 있을까요. 등이 땀에 흠뻑 젖어 가면서 잘 모르는 호치민 시 시내를 소개 해 주기 위해서 정말 많이 걷고 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전쟁 박물관만 가고 안가기로 했어요. 사실 우리가 너무 힘들었고, 아직 죽음의 12시에 움직일 용기가 안났던 것 같아요. 제발이지, 썬크림이 태닝크림으로 변하는 12시에는 움직이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린 항상 12시에 그렇게 돌아 다녔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여러 생각이 겹쳐서 너무 글이 산재되있는 듯 하네요. 정리를 하고 싶지만, 그러자니 추가를 해서 더 복잡해지면 더 복잡해지지 정리 될 거란 생각은 안들어서 그냥 올립니다. 머리아프시거나 글읽다고 힘드시면 그냥 살포시 알트 F4를 누르시는게 나을거 같아요. 저도 다시 읽고 나니 그냥 끄고 싶긴하네요. 그냥... 너무 생각없이 쓴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 ㅜ.ㅜ
철없는 춈푸와 놀아주는 아름다운 그들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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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나의 화두는 사람이었다.한국에서도, 남들이 딱히 관심갖지 않는 NGO활동에 그리 마음의 자리를 내줬던것도 나와 함께했던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 덕분이었다. 태국에서도 마찬가지. 길과 하늘, 야자수, 수없이 예쁜것이 많지만 가장 예쁜것은 사람이다. 가장 아름다운것은 우리의 인연이다.그 사람- 중에서도. 오늘은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비비적대고있는 이곳 쌈캉펭 YMCA는 여름에 슈퍼키드 캠프등의 데이캠프를 진행하거나 주말에 정규 수업, 평일 태권도수업 등을 진행해서 아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해서, 나는 항상 "정신연령이 똑같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놀고있다. 그런데, 공부방 봉사를 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단체로 만난것이 처음이어서, 정말, 아이들이 나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그리고 내가 미워했던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다시한 번 떠올리게 된다. 자질이 부족해서일까, 아무래도 예쁜 아이 있고 놀아주기 힘든 아이가 있다.특히 가장 힘든 아이들은 질투심이 많은 아이. 자기에게서 눈이 조금이라도 돌아가면 바로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아이. 옆에 내 손을 잡은 약한 친구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는 아이. 아이가 미워지는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당황스러운 경우가 많다.도이따오에서도, 람푼에서도, 쌈캉펭에서도, 가는곳마다 그런 아이들이 있다.그리고 사람 마음이란것이- 그런 아이들보다는 그 아이들에게 밀려나는 작은 아이들에게, 그러면서도 수줍은 미소로 곁에서 맴도는 '착한'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는것이 사실이다. 쌈캉펭 YMCA의 대표적인 '나의' 골칫덩이였던 눅.나는 자주 카운터쪽으로 놀러나가서 거기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들고, 돌리고, 집어던지고, 신발벗기고, 소리지르고 하면서 놀았다. - 그러다 혼도 많이났다 - 항상 나와 함께하는 대표적인 아이들은 빅, 리우, 눅 삼총사. 참 신기한 삼총사였다.빅은 거칠고 시끄럽고 꽥꽥거리고 두 다리를 쉬지않고 움직이는 전형적인 남자아이(이 사진에서 마지막이 '빅')그리고 사진은 안찍었나보다. 리우는 빅보다 덩치도 작고, 더 여자아이처럼 부드럽고, 수줍게 웃는 남자아이.눅은 이 셋 중에서 대장 역할을 하는 기 세고,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여자아이.역시 처음 셋이 놀때는 가장 약한 리우에게 마음이 갔다. 하지만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됬다. 리우보다 힘이 센 빅이, 거칠게 장난치는 것 같지만 항상 리우를 챙겨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던 것이다.그동안 질투심에 친구를 밀어낸 아이들을 많이 봐서, 주로 그럴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잔잔한 감동이었다. 슈퍼키드 캠프에는 눅과 빅만 있어서, 계속 리우가 아픈줄알고 리우를 찾는 나에게 리우가 주말에 오자마자 손을 끌고 와서 내 품에 안겨주던 아이, 장난치다가 리우가 속도가 떨어지면 살며시 와서 리우도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던 착한 빅!그리고 빅과의 심한 장난에 빨개진 내 손등을 가져가 입으로 후후 불어주던 사랑스러운 리우는 정말 나에게 자식같은 (?) 완소남들이 되었다.문제는 눅. 이 세명이 어찌 친구인가 싶을 정도로 눅은 욕심이 많았다. 내 한쪽 손은 자기가 나와 떨어져 있을때도 자기 전담 자리로 비워놓아야 하고, 다른아이와 놀아주고 있을때도 마구 끼어들어 놀아달라며 손을 내밀고, 내 옆을 차지한 아이를 밀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눅을 어떻게 해야할까 참 많이 고민하던 나는, 다른 아이들이 섭섭해할까봐, 눅이 내미는 손을 조금 모른 척 하기로 했다.그렇게 몇 일을, 눅보다 다른 약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졌더니, 드디어 눅이 삐졌다.나를 봐도 아는척도 안하고, 혼자 쀼루퉁한 얼굴을 하고 멀찌감찌 앉아있었다.언제는 내가 인사를 하니, "이제 삐 쳠푸랑은 안놀아!" 로 추정되는 말을 뱉고 뒤돌아갔다.옆에서 바라보던 피 멈이 그저 웃었다.사실은 눅은 상대하기가 많이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고, 눅 때문에 의기소침해진 다른 아이들을 많이 봐 온 터라, 눅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라리 편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자질이 참 없는 생각이었지만.그러기를 며칠째, 눅이 표정이 심통에서 점점 가끔 슬퍼보이는 것이 신경쓰일 무렵.빅과 리우가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확실히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가서 눅과 놀아주라는 말 같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눅에게 다가가고, 그리고 눅이 삐져서 지나가니 자기들도 어쩔 줄 모르고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했다. 그 진지한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참 멋있기 까지 했다! 그 후로 자기들끼리 온 힘을 다해 나와 눅이 화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그 때 생각했다.나는, 무슨 기준으로 - 나의 편협한 눈으로 - 그 아이들의 관계를 규정짓고, 눅의 욕심많은 성격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한 리우, 상대적으로 마음 넓은 빅이 마음아플꺼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그것은 그냥 나의 귀찮음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심이 많고 욕심이 많다해도 결국 사랑이 필요한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을. 내가 참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아이들은 그렇다. 공부방을 나갔을 때도, 아이들 사이의 룰은 어쩌면 어른의 그것보다 현명하고 평등하고, 엄격하다는 것을 깨닫고 감탄하곤 했었다.간단하다, 그저 누군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들의 관계를 맺어가는것.나는 그 아이들을, 어른의 눈으로 보며- 힘 센 아이가 권력관계를 가지고 작은 아이를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 아이들 사이에는 분명 우정이 있고 그나름의 평화로운 관계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 아마 귀찮음과 당황스러움이란 것에 두 눈이 가려 - 못 본, 아니 '안 본' 것이었다.그 후, 빅과 리우마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느날 빅과 리우와 같이 신발뺏고, 코알라 놀이를 하며 소리지르다가 그걸 바라보고만 있는 눅에게 자연스럽게 장난을 걸었다. 며칠 나를 무시하던 눅이 기다렸다는듯이, 처음보는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장난에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빅과 리우의 표정도 한층 빛이났다. 신나게 웃었다.그렇게, 눅은 다시 나의 친구가 되기로 한 것 같다. 왠지 나는, 내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아이가 나의 좁은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해 준 것 같았다. 그 날 눅이 내밀었던 시큼한 맛의 과일은 진짜 맛있었다.명절 1주일간 사랑스러운 슈퍼키드들과 그 삼총사를 못봤다.내일 아침, 아이들을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어느때보다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설렌다.아이들 뿐만이 아니라,여기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가르친다.우리 팀원,스탭- 피 낭, 피 멈, 피 매, 피 푸, 피 프레, 피 페차린, 피 툰, 피 똔, 피 샤, 요 옹*꽃보다 남자 홀릭 닝, 너무너무 귀여운 바이!유스리더 - 여자 3총사 "똥먹어!" 에 이어 "똥구* 먹어"까지 내게 가르친 빳,넌,웨제발 팬츠업, 뿌이. 코는 파지만 순정사나이 윌리엄. 볼때마다 새로운 위.1+2 3종세트 고딩이들 스낵홀릭 겜, 변태손금 북, 맨날 나랑 싸우는 뱅,독특한 펀, 못본지 오래된 땡,모,위, 등등, 쏭끄란때 너무 이쁜모습으로 나타나 여자팀원들이 서로 쳐다보며 "각성하라!" 라고 소리치게 만든 까터이(레이디보이) 핌, 한번씩 스치는 미소짓는 사람들,집 앞 아이스크림가게 쏘쿨한 아저씨, 집 옆 슈퍼 항상 볼때마다 강아지 앞발들고 싸왓디쨔오 라고 인사시키는 아주머니,벌써 보고픈 우리 서양동생 볼수록 귀여운 왕국이-로빈슨 지하 1층에 있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언니와 이승기닮은 훈남청년람푼의 내새끼 폿!떠이 하우스의 그들 ㅋㅋㅋ보고픈 범이, 아짠 아리, 크루 게, 애, 닝 등등 작년 한국방문멤버!워킹스트릿 사이즈 맞추는 아줌마, 똥아저씨와 친구들!음...그리고..쨈....그래 쨈도...쨈..쨈도 좋은아이입니다...하하......지금 당장은 생각나지 않아서 까먹었던 수많은 사람들이나를 행복하게하고, 시간이 가는걸 아깝게하고, 가르친다. :)내가 '감히' 돕는다고 나서거나 알린다고 나설것이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면겸허히, 열심히 배우고 오는것도 좋은 봉사. 열심히,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즐기고, 열심히 대화하고, 열심히 웃고.그 눈동자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으면 :)마지막은람푼으로 어제 떠난 보고픈 왕국이를 추억하며 ㅠㅠ작캄 하이스쿨은 왕국이를 돌려내라 돌려내라!!왕국이의 솔로콘서트, 맨발, 춈푸 굿모닝? 하는 인사, 맥북, 스투피드! 러브신 헌터 등등을 매일처럼 봤는데 이제 한참 기다려야 다시 본다니.ㅠㅠ완전한 이별은 아니지만, 타지에서의 안녕은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다음에 또 만나! 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게. 누구와의 이별이라도.오늘 다음에봐- 라고 인사하고 돌아선 이가 우리의 일정과 얽힌다면 그것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항상 머릿속에 맴돌아 슬프다.
치앙마이' 090412 너희가 쏭크란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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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저희 태국팀은 태국의 가장 큰 축제인 쏭크란을 함께 즐겼습니다.허허,정말 그 희열과 폭발 그리고 자유로움은 현장에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합니다. 쏭크란이란 태국에서의 새해를 알리는 명절입니다. 태양의 자리가 백양자리에서 황소자리로 옮겨 갈 때라고 하네요. 물을 끼얹는 의식을 통해 더러운 것, 악한 것 등을 씻어내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원래는 3일간이지만 이번에는 주말이 낀 덕에, 그리고 원래 그랬듯(!) 그 전후를 합해 일주일 가량 쏭크란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쏭크란이 시작되기 전 동네에서 맛 본 쏭크란 만으로도 이미 저희는 충격을 받은 상태..길가에 서서 드럼통에 물을 받은 뒤길 가에 서서 지나가는 모든것에 물을 뿌립니다.물을 뿌린다고 하면 물총 정도를 생각 하실 수 있을텐데.. 허허허.. 그렇다면 오산.물총은 정확한 겨냥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저격용 총이랄까요.그렇다면 진짜 우리가 필요한건 뭐~~~~?바로바.가.지.-_-. 입니다.사용법은 이렇습니다.바가지 가득 물을 담습니다. (아이들 모래놀이 할 떄 쓰는 양동이 정도의 크기..)그리고 후려칩니다.그냥 막 후려칩니다.가로로 세로로 후려칩니다.쩍쩍소리납니다.뿌리는 사람들은 신나고 맞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습니다.........-_-........태국은 오토바이 운전자가 많은데요.. 다소 위험해 보이리만치 거칠게(!) 물을 뿌리지만누구 하나 화 내지 않는다는게 정말 놀라웠어요. 처음에는 쭈뼛쭈뼛 물을 뿌렸다가 차나 오토바이가 속도를 늦추면 잡으러 오는건가 싶어 움찔하곤 했거든요..-_-;;;;;그렇게 마을에서 신고식을 치른 뒤 치앙마이 시내로 원정을, 고고고!!동네 호프집에서 보는 월드컵 경기와 시청광장에서 즐기는 경기 정도의 차이랄까요..하하정말이지 말로는 다 담지 못할 이야기들입니다.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월드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요,특히 2002 월드컵! 그 순간을 직접 겪는 것만이 설명의 전부인 순간들,바로 쏭크란입니다:)아쉽게도 광란의 순간을 담은 사진이 없...-ㅂ-;;;마무리 후찍은 기념사진을 올려보아요~
방한과 썬스크린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만능 한복입니다-ㅂ-;
한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니 많은 태국인들이 "태쟝쿰~(대장금)"을 외치며 얼음탄 물을 끼얹어 주었어요ㅠㅠ 하루종일 물 맞고 정신이 나간 덕에 다소 무리한 포즈로 한 컷.......................................
쏭크란을 함께 즐겼던 YMCA 유스 리더들과 한 컷.
각종 사건 사고가 많은 기간이라 더욱 세심하게 챙겨주었던 고마운 친구들.
+ 쏭크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와 유래 및 이야기들은 추후 다른 글을 통해서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흐흐
++쏭크란이 전통적인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그 유래나 의미보다는 물을 뿌리고 즐기는 축제적인 면만이 강조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특히 외국인과 여행자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나 라는 걱정 아닌 걱정도 들구요.. 사실 저도 처음엔 그저 신나는 물놀이로만 생각하고 있었...=ㅂ=;
열심히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히~
+++물놀이 뿐 아니라 전통적인 방법으로 쏭크란을 축하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도 다음 기회에..후후.
#1. 처음_ 다일센터에서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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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 어떤 말로 시작할 지 조금 부담이 된다. 오늘은 4월 17일. 캄보디아라는 나라로 온지도 벌써 한달 하고 12일이나 지났다. 그동안 나와 우리팀은 어떻게 지냈나를 생각해보려니 아득하다. 그래서 일기의 기록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다소 감상적인 이야길 하기 전에- 잠깐 현재의 활동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렇다(오늘 내용은 이것으로 할란다).
우리의 활동은 다일 센터에서 주를 이룬다. 입국 바로 다음날부터 시작했다. OT는 하루로 족했다. 평일 오전 8시 20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면 숙소에서 약 12km(내 짐작;;) 거리에 있는 시엠립 다일비전센터로 향한다. 새벽부터 그 날 식사의 장을 봐온 현지 스텝들과 '아론 소스다이(아침인사)'로 반갑게 인사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식사 메뉴는 다양하진 않지만 무척 맛있다. 볶음밥, 고기볶음, 계란말이, 캄푸치아 커리(여기 와서 딱 두번 먹음T-T), 뜨러꾸얼(미나리같은) 볶음탕(??) 등. 봉쓰라이(언니) 두 분이 요리를 맛있게 참 잘 하신다.
요리를 하는 곳에 파견된 해외봉사단? 덕분에 난 독특한 내공이 늘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수박 썰기의 달인이 되었다든지, 엄청 큰 계란말이를 몇 개씩 후라이판에 만들기 시작했다든지.. 한국에 있었으면 손도 대지 않았을 일들을 하려니 원.. 처음엔 느려터지고 실수도 많이 해서 오히려 일을 망쳤지만 점차 솜씨가 좋아지고 있다. 너무 거리가 멀거나 여건이 좋지 않아 밥을 지원해줄 수 없는 곳에는 빵을 만들어 제공한다. 주로 소보루빵을 만든다. 덕분에 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도 배웠다. 처음으로 이곳에서 소보루빵을 먹고는 정말 맛있어서 자꾸자꾸 먹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내 옆에서 뱃속으로의 입수를 기다리고 있다. ㅎㅎ
이렇게 요리를 하고 있을 때, 밥퍼 차량이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큰 트럭 한 대와 툭툭이 한 대가 사이좋게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아이들이 차량으로 달려오는 모습은 정말 정말 정말 사랑스럽다. 리읍이라는 여자아이는 지훈오빠를 좋아하는데 내가 데리러 가는 날에 날 먼저 보면 “지훈 마오?, 여은 마오?(지훈오빠 왔어요?, 여은언니 왔어요?)”하고 물어본다(여은이는 컴퓨터 작업을 하느라 몇일 센터에 안갔었다). "크뇸 엇쫄쩢 때꾸르~~(대규오빠 싫어요~)"라고도 한다. ㅋㅋㅋ 점이 커서 그렇다나;;; 귀여운 녀석이다. 센터 근처 마을 아이들을 포함, 이른바 빈민촌이라 하는 프놈끄라움 마을, 톤레삽 마을의 아이들까지 모두 센터에 집결하면, 센터는 그야말로 정신이 없다. 처음엔 외국인이라고 우리를 신기해하던 아이들이(이 때에는 정말 사교성 좋고 애교가 많은 특정 아이들만 다가온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갈 때가 된 것 같은데도 안 가니까;;; 더 잘 다가와주기도 한다. 같이 놀아줄 아이들은 많은데 몸이 한 개니, 그야말로 한계를 느낀다. 특히 체력의 한계가 빨리 오는 내게 자꾸 “봉쓰라이 이우(업어줘요)~”하면, 하…. 귀신 같은 아이T_T. 나의 작은 목표는 그저 하루에 한 아이 이상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다. 오늘도 인, 닛, 사우, 끼윳 네 명이나 외웠다. 아이엠그라운드;를 소개해주면서 하니 서로 써바이써바이했다(즐거웠다).
배식,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밥 배식에 크게 데인 적이 있다. 밥을 퍼나르다가 나중에 밥이 부족해서(너무 많이 배분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빵을 준 사건이 있었더랬다. 와- 몇 안되는 충격 중 하나였다. 너무 미안했다. 그 이후론 배식을 할 때 수박을 주든, 계란말이를 주든 자꾸 아이들 수를 점검하면서, 그야말로 긴장하면서 배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당히 모두에게(아이들은 적게는 400명에서 6-700명까지도 간다고 한다) 잘 배식을 했을 땐 정말 기쁘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일에 기뻐할 줄 몰랐다;; 아이들은 비닐봉지를 잘 가지고 다니며 자신의 밥 혹은 밥을 더 받아서 집에 들고 간다. 자기밖에 모를 것 같은 그 어린 나이에 집에 있는 가족들을 챙기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대용량의 설거지와 청소가 시작된다. 그렇게 수많은 그릇들을 한꺼번에 설거지 해본 것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플라스틱 식판이라 그리 무겁진 않다. 엄청 강한 설거지 세제는 처음에 우리의 손 껍질을 다 앗아갔다. 이젠 손이 모두 적응을 해서 문제없다. 아이들이 밥을 먹고 간 자리도 엄청난 것은 마찬가지. 캄보디아의 쌀이 바람에 흩날릴 것 같은 것을 이 때 참 감사하게 된다. 우리나라 쌀처럼 찰진 쌀이었으면 다 눌러 붙어서 청소하기가 더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설거지와 청소 그리고 뒷정리를 모두 마치면 밥퍼 일과는 종결이다. 모든 활동을 마치고 먹는 밥은 정말..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 맛이다.
내가 인지한 이곳 캄보디아 시엠립에서의 밥퍼 활동은 사실 단순한 매일의 반복이다. 우리는 보통 반복되는 일상을 무척이나 싫어하기에 보다 새롭고 의미 있고 멋진 일들을 찾으려 한다. 그렇지만 이 활동은, 정말 ‘밥’을 나누는 일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 했던 그런 급식이 아니다. 정말 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는 것이다. 때문에 이 일이 난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이 일에 동참하는 것에 감사할 때가 많다. 물론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다. 그리고 그 때마다 다시 힘을 얻게 하는 건 역시 아이들이다. 서로에 의해 즐거울 수 있어 좋다.
단상 Ⅰ : 한달여간의 깊은 인상, 그 어떤 것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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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단상. 말 그대로 생각나는 대로 단편적으로 적은 글들.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오롯이 글에 담을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기 위해 조금이라도 정성을 들여 본다. 얼마나 솔직할지는 자신할 순 없지만, 수많은 끄적거림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뱉어 보고 싶다.
옥상 : 나를 즐겁게 하는 그곳
Cao son lam hotel의 옥상에 앉아 Buena vista social club의 Chan Chan을 들으며 333 맥주를 홀짝인다. 그리곤 어둑어둑한 이곳에서 이것저것 끄적이기를 반복해 본다.작열하던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나면, 그 열기를 거둔 시원한 바람이 제법 거칠게 주위를 감싼다. 아프도록 내리쬐는 햇빛이 과연 어김없이 내일도 나타날까 하는 의문과 걱정이 고개를 든다. 한국에서의 옥상은 '은밀함, 불건전함, 폐쇄적'의 어쩌면 불온한 단어들이 쉽게 떠올려지는 그런 장소였다면 지금 내가 자리하고 있는 호치민의 옥상은 소통의 장소이자, 사색과 감상의 시간, 휴식과 운동의, 모든 것이 가능한 공간이다. 시원하고 기분이 묘하다. 꼭 이 공간에 혼자만 갇힌 착각 마저 들게 하는 어둠이다.자전거 : 미워할 수 없는 그것
호치민에서의 삶에 자전거를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다. 울고 웃게 만드는 사고뭉치 자전거들. 자전거를 못타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은 이곳에선 도움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공원에서 잠깐 타는 것이 자전거와 함께한 시간이었겠다만, 이곳은 삶이며 교통수단이기에 자전거와 함께 해야만 했다. 차와 오토바이로 가득한 차도로 우리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야한다는 얘기는 처음엔 믿기어려웠고 사실 믿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렇게 몇번의 연습과 길 익히기를 끝낸 후 조심스레 호텔로 출발해본다. 맙소사. 뽀얗게 떠다니는 먼지와 빵빵 거리는 소리, 엉성한 교통체계 (지극히 한국에서 살아온 나의 관점에서)에 자동차 보다 훨씬 훨씬 많은 오토바이, 길가에 널려있는 가판들에, 과일이며 강아지며, 이차선 조금 더 되는 그 길가는 걸었을때는 몰랐던 어떤 것들이 더 있었다. 재밌게도 하나도 모르겠는 이 무질서속에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바싹 긴장하면서 페달을 밟던 내가 조금은 누그러질 만큼의 소통이 그것이다. 매끄럽지 않은 자전거 실력으로 삐끗삐끗하던 나는 연신 '씬 로이(미안해요)'를 외쳐댔는데, 종종 눈이 마주쳐지는 베트남인들의 웃음을 보며, 어느 순간 즐거움을 느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덕분에 먼지 한가득) 자전거로 헤집고 다니는 경험에 있어 짜릿함과 동시에 내가 있는 이곳이 베트남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렇게 한달 남짓 타고 나니 순수하게 달리는 데서 오는 쾌감도 맛보고 있다. 가끔 자전거로 강을 건너 조금 먼 마트나 서점까지도 가보곤 한다. 아, 강을 건너기위해 다리를 오를땐 다리가 부서질 것 같은 - 좀 과장이지만 - 힘듦을 느끼지만 내려올때 페달에 살포시 발을 올려놓고 올라가는 속도와 뺨에 닿는 먼지 섞인 시원한 바람을 거침없이 느낄때면 진짜 즐거움의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터져나온다. 물론 앞 뒤로 상현이와 병칠오빠가 타기 수월하게 항상 도와주고 있지만 말이다:) 깜언, 안 바 엠. (고마워요)아, 그렇게 재미만 있었으면 좋았으련만.차도 한가운데서 넘어져버렸다. 정주행 하기 위해 차도를 건너다가 순식간에 다가온 작은 트럭에 지레 겁을 먹고 거의 핸들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좀 아프긴 했지만 툴툴 털고 일어났는데, 후에 상현이에게 들어보니 넘어져 있는 동안 뒤에 오토바이와 차가 정체되어 있었단다. 조금 창피하고 미안해진다. 여튼 조금 멍든 것 외엔 아무렇지 않았지만 소위 '심리적 외상'이랄까. 엄청 긴장되고 불안해지는 거다. 뭐 현재는 다시금 씽씽 즐거이 혹은 피로를 느끼며 자전거와 함께 하고 있다. 캔들 데이 : 우리들의 속 내 우리는 미리 계획 했던 대로 간혹 캔들 데이를 갖는다. 속내와 속사정을 나누기 위한 부러 만든 시간들이 우리들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든다. 가감없이 자신을 터 놓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그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약간의 흥분이 남는다. 이런식의 묘한 설레임과 흥분은 내게 아직 -당연하게도- 유효했고, 그것은 여전히 역동적이었으며 찬란했다. 한 달 남짓의 베트남 정착기 속에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나 하는 물음의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내 머릿 속 : 단순하거나 혹은 우리의 현재 위치는 역시나 혼란스러웠다. 베트남은 커녕 호치민조차 어정쩡하게 발이 묶여 멋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상황속에 내가 여행자가 아님을 절감한다. 여행자인가 이방인 혹은 손님인가 뭐인가 하는 그런 물음들. -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얼마든지 신날 수 있는 해방과 일탈의 기회, 또한 오랜 관성을 벗고 새로운 감각을 획득하는 것과 내가 속한 곳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기회이다. 그리곤 당분간 기약 없는 타지로의 삶을 아쉬워하며 지금 이곳에서의 시간을 야금야금 탐닉하고 싶다. - 온전히 편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노출시켜 봄으로써 진정으로 차이를 인정하고, 관대함을 연습한다.
이십여년을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내던 다섯명이 생전처음 가보는 곳에서 생전처음 보는 사람들과 낯선 언어로 살아간다는 상황 자체가 스스로를 깨는 혹은 깨지는 경험일 것이다. - 결국, ‘한국’이라는 대명제는 타지에 와서 눈에 띄게 도드라진다. 한국과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점이 한국이 우수한지 혹은 열등한지를 자연스레 계산하고 그것들을 눈으로 쫓는 나를 보며 약간의 자괴감 마저 들었다. '한국이랑 비슷하네, 혹은 한국이랑 비교하면 어떠어떠하네' 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금새 그것들은 머릿속으로 침투해온다. 정치적으로 그름을 백날 아는 것과, 부딪치면서 느껴지는 찰나의 감정과 생각들의 갭은 생각보다 컸다. 의식적으로 탈국가적이기 위해 노력하고 지구시민임을 인지하는 것. 앞으로의 4개월간 나의 과제임은 자명하다. 예상했던 대로 두서없고 정리되지 못한 거친 글이되었지만, 그 자체로 내 감정들이 녹아 내렸다 생각하련다. 그리고 어느새 늦은 밤이 되어버렸고, 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그립다. 모두들 좋은 꿈 꾸세요. Chuc ngu ngon.
Yuna의 하루 중 (기상~ymca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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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어떤 공식적 행사나 활동이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베트남 속의 저의 삶을 알려드리고자 작성되고 있는 글 입니다. Reality에 초점을 두어, 읽는 이가 다소 불편 할 수 있으나, 진솔하게 이야기 하고자 노력 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기상은 8시, 아침식사는 8시. 이 말은 결국 눈 뜨자마자 바로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제일 먼저 일어나는 슬기의 인기척에 잠시 눈을 뜬다. 슬기는 오늘도 역시 침대 모퉁이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다. 무섭다.) 익숙한 광경이지만 잠시 흠칫 놀란다. 그리곤 5분이라도 더 자기 위해 애써 외면한다.- 바로 이자세. 눈은 아직도 반쯤 감겨 있고 머리는 산발을 한 체 면발을 집어 든다.(베트남의 아침은 웬만하면 국수다.) “너희 아침에 안 씻어? 으하하” 병칠 오빠가 농담 삼아 한 말..... 젠장...걸렸다. 이렇게 사소한 이야기가 오고가고 아침 식사는 마무리 된다.-온 갖 종류의 국수다.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지금은 그닥 반갑지 않다.
화장실 못 간지 이미 일주일! 제발 오늘만은 제발...기도하고 쾌변을 위한 자세를 공들여 해도...역시,오늘도 글렀다! 이제 그만 나가자..온 다리, 심지어 팔까지 멍투성이에 잔뜩 상처를 남기고야 자전거 타기를 포기했다. 자전거로 10분, 걸어서 30분. 다른 팀원들 보다 일찍 출발해야 하지만, 오토바이로 가득한 거리를 보며 백번 잘한 일이라고 위안한다.-상처가 잘 나오지 않아 속상한 사진이다. 팔에 박힌 선명한 자건거 핸들자국(거의 다 나았을 때). 많은 오토바이로 도로가 3시간 정도 마비된 날. 작렬하는 태양과 콧구멍을 막아버릴 듯 한 먼지를 방어하기 위해 큰 두건으로 얼굴의 4분에 3을 감싼다. 땀은 얼굴에서부터 출발해 목을 타고 내려와 등까지 적신다. 큰 숨을 내실 때 마다 두건이 코로 빨려 들어와 콧구멍을 막는다. 아,,,,, 답답하다.-나와 잠시 함께 했던 길동무 상현이 잠시 두건을 내렸는데, 이번에는 먼지가 콧구멍을 막는다. 이래저래 오늘도 제대로 숨 쉬기는 글렀군 하고 생각하는 찰라!! 길거리 개들이 짖으며 달려든다....십년감수했다...개들 때문에 아니라, 곁에서 화들짝 놀라 격하게 달려든 슬기 때문이다. (왜 같이 공포영화 보는데, 옆에 있던 사람 비명소리 때문에 더 놀라는 경험 같은) 달려든 슬기를 매몰차게 떼어버리고 걸음을 재촉한다.드디어, YMCA건물이 보인다!!! 예!!~~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