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온아띠 in CAM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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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티모르에서 흥겹게 밥을 짓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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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물집이다. 그것도 두 개다. 오늘은 특별히 '뗌뻬'를 많이 사온 마나와 함께 밥을 짓고 싶었을 뿐인데. 한창 칼 쓰는 데 재미가 들린 나는 마나와 함께 뗌빼를 썰기 시작했다. 하나 두 개 세 개.. 썰어 가는데 살짝 검지 손가락 안 쪽이 아파왔다. 칼의 무딘 쪽과 부딪히는 부분이 빨개진 것이 보였다. ‘마나는 나보다 더 작고 여린 손으로 빠르게 썰어 가고 있는데’ 고로 나도 다시 흥겹게 뗌뻬 썰기에 몰입했다. '괜찮아! 재밌다! 재밌어!' 그렇게 썰기를 마치고, 상추를 한 장 한 장 뜯어 다듬은 뒤 씻고, 토마토까지 썰어 얹어 찬 두 가지를 만드는 데 일조한 뒤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책을 좀 볼까 하는데 계속 아까 그 자리가 아픈 거다. 보니까 글쎄, 물집이 하나 두울 돋아나 있다. '으악!' 갑자기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아파도 칭얼대기 좋아하는 나이지만. 이번 만큼은 넬슨 까롤리나 나노에게 말도 못했다. 사진을 살짝 찍어 남기고,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그동안 얼마나 그만한 일도 안 했으면 10분 만에 물집이 잡혀 버렸을까. 오... 한국에서 난. 사실 바보였다. 요리에 관한 한, 부엌일에 관한 한 내 경험은 전무했다. 절대적으로 어머니께 의존하고, 도시의 편리에 젖어 하기 싫은 일은 제쳐뒀다. 가사는 절대 내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시도조차 안했던 거다. 그리하여 스물 셋의 어엿한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잘 하는 요리가 있기는커녕 라면 물도 못 맞추고 밥도 지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양평에서의 2박 3일이 나에게 그리 길었던 건, 추위와 서먹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취사'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도 잘 보이고 싶은 팀원들 앞에서.. 식사 준비만 할라치면 꿔다놓은 보리짝마냥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어찌 그리 싫었던지 모른다. 그때 처음으로 '난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라고 생각했다. 동티모르에 온지 딱 두달이 된 지금에는, 흔쾌히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하겠어"라 말할 줄 알고, 주말이 다가와 직접 요리를 해 먹게 되는 것에 기뻐하고 있다. 아침 일과가 된 빨래와 바닥 청소도 사랑한다. 내 힘으로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을 준비하고 단장하는 것은 단순히 '가사일을 한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내 몸을 드디어 스스로 건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이에게 가사 노동을 제공하면, 삶을 지탱하는 아주 원초적인 행위를 공유하는 것이고 말이다. 나눔 토론 회의로는 채울 수 없는 그 느낌. 티모르에 와서 배우는 것은 점점 늘어간다.이지숙 jisooko@gmail.com
1.('♡') 뺑 언찌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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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 와서 가장 나를 당황하게(혹은 기쁘게) 만드는 단어'แป้ง อรจิรา(뺑 언찌라)'그녀는 태국에서 꽤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자 모델 겸 배우이다.한국으로 치면 송혜교, 전지현 정도 ? ^^*그렇다 !나는 그녀를 닮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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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에 도착한 첫 날, 공항에서 '마리' 목걸이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처음 온 날 부터 스탭들이나 유스리더 친구들은 날 보고'마리, 마리는 정말 태국 사람같이 생겼어' 라고 말하곤 했다.
현지인처럼 생겼다는 말, 참 듣기 좋다.라온아띠를 지원하면서, 라온아띠가 되고서부터 현지속에 녹아살길 얼마나 바랬던가 !그런데 고맙게도 나는 간단하게 '뺑 언찌라' 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단 한숨에 나는 태국인이 되었고 그들은 나를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솔직히 염훈오빠(똥카우), 수은(모아), 희진언니(퐈)의 태국인 포스를 따라가진 못하겠다.▲ 도요타 에너지 세미나▲ 국제교류 웰컴 파티 치앙마이 Y 호텔 (with Will)▲ 우리가 가게될 람푼 '왓타카' 스쿨▲ 쌈칸펭 Y 에서 일본,라오스,미국 캠퍼들과 함께 점심식사 할 때 !쇼핑을 할 때도 점원들은 나에게 태국어로 말을 걸고 심지어 오리엔탈 프린세스 라는 태국 브랜드 화장품 매장에서는 멤버십카드 발급을 권유하기도 했다. 물론 태국어로... 결국 300밧 주고 가입-_ ㅠ송크란시즌 때 유스리더들과 함께 첫째날을 치앙마이 스트릿트에서 보냈었는데, 그 때도 장난끼 많은 우리 스탭들은(특히 피 똔, 피(?) 위) 지나가는 사람들 한테 내가 '뺑 언찌라'를 닮았다고 큰 소리를 쳤다. 당황한 내 모습이 재밌었는 지 스탭들은 장난을 즐겼고, 그러다 내가 조금 뾰루퉁 해지면 (피)위가 예쁘게 웃으면서 나에게,'마리, 마이뻰라이, 마리 나락 막막(마리, 괜찮아, 마리 엄청 귀여워)'라면서 위로를 했다. 나는 또 푼수처럼 싱긋 웃고 =)어찌 되었든 나는 태국 속에 녹아서 잘 살고 있다.그리고 새로운 재미도 찾았고 :^)어느 나라에 가나 나는 항상 그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외국인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내 얼굴이 그렇게 특별하게 지리적 특성을 띄고 있지 않아서인지(요새 美의 기준이 평준화 되고 있다던데 그 덕분인가?)덕분에 왠만한 동아시아 국가에선 입다물고 있으면 현지인 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사실 가끔 내가 한국인인가? 싶을 때도 많으니까...부모님, 감사합니다.예쁘게 낳아주셔서 덕분에 나는 태국에서 정말 라온아띠가 된 것 같아요. :^)
#1 에세이 편리함에서 오는 불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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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리함에서 오는 불편함
라온아띠 2기 베트남팀으로서 보낸 첫 한 달
우린 한 달 남짓 호치민 YMCA 로 왔다 갔다 하면서 베트남어 공부를 하면서 보냈다.
거의 우리끼리 하는 공부였다. 숙소도 좋고 인터넷도 잘 된다.
게다가 호치민은 대도시라 웬만하면 원하는 걸 다 구할 수도 있고, 시내 나가면 외국인도 많고 한국 사람들도 많다.
난 베트남에서도 싸이월드를 하고 한국에서 쓰던 샴푸나 로션을 사서 쓰고 있다.
3월 한 달 동안 YMCA에서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여가 시간이 많았다.
가끔 주말에는 호치민 YMCA 봉사활동 하는 학생들과 시내 명소를 방문하거나 놀러가는 정도였다.
분명 라온아띠를 통해 배운건 불편함을 감수하라고 배웠는데 불편한게 거의 없었다. 1기를 통해 전반적인 생활을 듣긴 했지만 이만큼 편하고 여유있을 줄을 몰랐다.
라온아띠 어떤 팀보다도 편하게 생활했었지만 속으로는 혼란스럽고 불편했다.다른 팀이 시골이나 고산 지역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사진과 글을 보면서 부럽기까지 했다.
분명 대도시에서 편리하게 생활하는데 고립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팀원들과 대화를 통해 그리고 내가 여기서 큰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왔으니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노력했다.지금 난 봉사활동 하러 오기 전에 반은 유학생, 반은 관광객이라고 생각하고 지냈다.
주말엔 따로 나가서 시내를 보기도 했고 기계적으로 공부 하던 베트남어에도 사람들한테 말 걸면서 재미를 붙였다.
언어 배우는 기간이 너무 길었다. 물론 내가 조금 더 능동적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매일 같이 가던 호치민 YMCA 2층에는 봉제 공장을 운영해서 15 - 24 세 정도의 여자애들이 일도 하고 그곳에서 살고 있다.내가 먼저 말을 걸 수도 있었는데 3월 달 동안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못한 게 사실이다.우리들 스스로도 이 점을 반성하고 지금은 일과 끝나고 Y 앞에서 같이 놀거나 수다 떨기도 한다.
아무리 대도시에서 지내더라도 의사소통을 하면서 하면서 새롭게 느끼는 점도 있으니까
2) 한국대표가 아닌 한국인
4월에 3일 정도 희망학교인 직업 훈련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담당자 분과 얘기하다가 한국에서는 월급이 평균 얼마 정도 되냐는 평균 차 값은 얼마 정도 되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질문을 받고 당황하다가 대충 우리끼리 어림 잡아 대답했다.그 후에 캔들데이를 하면서 우리 끼리 이 얘기가 다시 나왔다.
한국 평균 월급이나 차 값은 각자 생각하는게 다 달랐다. 중요한 건 다들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하거나 불편함을 느꼈다.
예를 들면 날씨가 어떻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네 가지 계절이 있고 지금 기온은 대충 얼마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월급이나 차 값은 각자 생각하거나 처한 상황이 달랐고 아무래도 돈 문제이다 보니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돈 문제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나 경제 관련 질문을 받을 때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많았다.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국은 어떻다고 대답하기가 곤란하고 불편한지.사실 평균 차 값을 어떠냐는 질문을 받을 때 나의 가장 정직한 대답은 이거다.
내가 사는 지역은 차타는 것보다 대중 교통이 더 편하다. 그래서 차 면허도 없고 앞으로도 면허 딸 생각이 없어서 차 값을 잘 모른다.
물론 팀원들 각자의 솔직한 대답이 다 다를 거고 그 이유는 우리 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팀원들과 대화하면서 영지 언니가 라온아띠 국내 훈련 때 받은 교육 중에 배운 것을 다시 짚어주었다.한국을 대표하지 말라고. 대표하는 범위를 좁히라는 얘기였다. 한국은 이렇다고 얘기하기 보다는 서울은 이렇다. 우리 동네는 이렇다. 나는 이렇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기도 쉽지 않다. 기껏 한 달 반 동안 배운 베트남어로 모든 상황을 설명할 실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베트남도 상황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나중에 알아보니 베트남에선 차에 매기는 세금이 꽤 많아서 한국 보다 차 값이 비쌌다.
이 후에는 생각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다.베트남은 어떻다기 보단 호치민은 어떠냐 너는 어떠냐..한국이 어떻다기 보단 서울은 이렇다. 나는 이렇다..
정 나라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질문을 할 때면 각자 처한 상황을 고려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난 한국인이지만 한국 대표로 베트남에 온 건 아니니까
2009년 4월 중순 기점으로 쓴 글
from HCM VN
생활 - 적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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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에서 보낸 한 달 3월달 중심으로 적은 글입니다.
1. 베트남어
3월 달 우리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자 유일한 활동은 베트남어 배우기였다. 매일 같이 호치민 YMCA로 출근해서 때로는 누군가 선생님이 돼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우리 스스로 공부했다.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에게 선생님이 되준 사람은 바로 호치민 YMCA 총장이신 미스터롭, 쭈롭이었다.
우리들은 쭈롭에게 약 1주일 넘게 자음, 모음 그리고 성조의 기초 발음을 배웠다. 쭈롭은 명색히 YMCA 총장이시지만 외국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각종 바디 랭기지와 상황극?까지 연출해주신다. 열정적인 쭈롭의 수업 덕분에 서툴게나마 베트남어 발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발음을 배우고 한국에서 가져간 책으로 공부해도 성조가 6개인 베트남어 발음하기가 절대 쉽지 않았다. 쭈롭은 수업 시간에 연신 very easy 를 외쳐대셨지만 어쩌랴 우리에겐 절대 easy 하지 않은 발음이었다. 책을 통해 배운 베트남어를 현지 사람들에게 사용해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상황1
핸드폰 가게에서 가장 싼 걸 보여달라고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베트남어로) 직원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가고 베트남어가 통한 걸 기뻐하는 찰나, 직원이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
상황2
서점에서 어린이 베트남어 책을 구입하기 위해 직원에게 더 쉬운거 없냐며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직원이 우리 말을 못 알아들어 너무 갑갑한 나머지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본다. 발음을 못 알아들어서 갑갑할 때가 있었고 선생님이 없는 날이 더 많아서 우리끼리 공부하기가 무료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스스로 가끔 일기도 써서 사람들에게 검사도 받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나름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 첨부 3월달에 쓴 일기와 4월달에 쓴 일기)
아직도 부족하지만 4월달이 넘은 지금 5명 모두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되고 있다.
또 사람들에게 하루 하루 배우는 말도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베트남어 배우기는 아직도 현재진행2. 내겐 너무 버거운 자전거
우린 매일 같이 YMCA로 자전거 타고 출퇴근한다. 자전거로 단 10분 걸리는 길이지만 한국에서 자전거 타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
엄청난 오토바이와 쏟아지는 매연과 먼지 가끔씩 뒤에서 빵빵대는 차와 버스 등등 장애물이 엄청나다.
한국에서도 겨우 겨우 자전거를 타던 난 처음 2~3일간 거의 공포에 질린 상태로 출퇴근했다. 갑자기 나타나는 오토바이에 혼자 깜짝 놀라 동네방네 비명 지르며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알고 보니 이런 장애물을 피해 다니는 건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그래도 순발력을 발휘하고 팀원들 도움을 받아 겨우 다닐 만할 때 하필이면 내 꼬리뼈에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리 안장이 딱딱해도 그렇지 5명 다 타고 다니는데 나만 왜 이리 꼬리뼈가 아픈건지
요즘엔 윤아언니와 함께 걸어서 YMCA로 가고 있다. 걸으면 걸을 수 있는 거리지만 강렬한 햇살과 더위 속에 30분씩 걷긴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아침부터 더워서 베트남 사람들도 안 걷는다. 덕분에 동네 사람들은 더위 속에 걸어다니는 우릴 운동하는 줄 안다.
지금도 난 걸어다니는 중이고 정 날씨가 더울 때만 타는 중
추신 팀원들의 자전거 타는 유형
김상현(베트남 이름 : 떰) Tam : 자유인
자유자재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가장 잘 다룬다. 심지어 자전거 타고 오토바이도 추월가능. 길 가던 중에 자전거 체인이 빠질 때마다 고쳐주며 평소에는 가이드 역할까지 겸하고 있음. 자전거 탈 때만큼은 가장 믿음직한 멤버
정병칠 (따이) Tai: 보호자형
상현이와 함께 오토바이도 추월할 정도로 속력을 낼 수 있다. 항상 본의 아니게 자전거를 못 타는 팀원들을 자주 태우고 다니며 뒤에 태운채로 다리 하나도 거뜬히 넘는다.
김영지 (마이) Mai : 무난형
별다른 무리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잘 타는 편에 속함.
유슬기 (번) Van : 불안형
항상 급하게 방향전환을 구사해 보는 사람 불안하게 만든다. 그럭 저럭 탈 수준은 되나 안타깝게도 꼬리뼈를 자주 삐어서 자전거 타기를 자제하는 중
박윤아 (안) Anh : 부상형
자전거를 가장 적게 타나 탈 때마다 팔뚝, 다리에 멍이 든다. 심지어 최근에는 병칠 오빠 뒤에 탄 상태에서 넘어져서 무릎 부상 중 슬기와 함께 걸어갈 때가 많으며 주로 뒤에 타는 유형자전거가 자주 고장나서 힘들 때도 있지만 베트남팀의 필수 교통 수단이다!
by명래] 동티모르에서 온 편지 - 단상(斷想)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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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에서 온 편지 - 단상(斷想) 1
09년 3월 18일
제목 : 따로 또 같이
- 적도 아래에 위치한 남반구의 땅 동티모르는 전형적인 1)열대기후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의 계절이란 건기와 우기 두 가지 뿐이다. 우리가 도착한 3월은 우기의 막바지였다. 매일 오후에 한차례 엄청난 소나기가 내렸다.
나는 한국에서도 방안 혹 차안에서 듣는 빗소리를 정말 좋아했다. 여기서 듣는 비 소리는 또 나름의 감상이 있다. 하지만 나보다 더하게 이곳 사람들은 비가 오면 거리 나들이?를 나올 정도로 비오는 것을 소리 지르며 환호한다.
그런데 오늘 휴일 낮잠을 곧이 자던 나를 팀원 중 막내가 다급히 깨웠다. 눈을 뜨고 부랴부랴 나오니 집 마당으로 물이 점점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마당의 물을 얼른 퍼서 밖으로 나르는데 집 밖 역시 도로보다 지대가 낮고 하수구가 막혀서 집으로 물을 쏟아낼 기세였다. 부랴부랴 쇠막대기를 가지고 현지분과 함께 하수구를 뚫고 동시에 마당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쯤 되니 한없이 물을 쏟아 붓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정신없이 물을 푸다가 어느 순간 집밖 풍경을 볼 겨를이 있었다. 윗옷을 벗고 즐거운 미소를 띠고 길거리에 나온 이들에 모습을 보면서....
같은 하늘의 비를 바라보는 풍경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순간, 일 년 전 캠퍼스가 생각났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첫 학기의 설렘은 신입생의 입학에 비할게 아니었다. 전역 후 만난 반가운 친구들과 여대생? 그토록 듣고 싶었던 수업 등 그야말로 꿈만 같았던 07년 9월이었다. 개강 보름 후 나의 생일이 다가왔다.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따뜻한 미역국은 아니라도 은근히 2년 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일날 아침 나는 열병이 나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고 오후2시가 넘어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혹시나 하는 무언가의 기대를 가지고 투혼을 발휘하여 학교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에게 특별한 오늘은 그들에게 지나가는 일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군대 다녀와서 ‘아직 정신 못 차렸냐?’며 ‘벌써부터 자느냐고 지각이냐!’는 평소 가장 의지하는 형의 말에 눈물이 울컥했다.
우리는 같은 날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기대했던 것이 너무나 달랐다.
그리고 간신히 눈물을 참고 강의실 밖을 나온 내 앞에 있는 캠퍼스의 모습은 내 마음과는 다르게 화창하고 평온했다. 지나는 학생들 모두 어쩜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지 .........
우리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이해 없이 다른 기대를 가지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생활을 함께 한다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대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영원히 우리는 “따로”인 것이다.
by명래] 동티모르에서 온 편지 - 일상(日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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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에서 온 편지 - 일상(日常) 1
09년 3월 16일
제목 : 도착!
저는 지난 3월 6일 적도(赤道)를 넘어 10시간의 비행 끝에
무사히 동티모르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5명의 라온아띠 팀원들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라는 곳의 딜리대학교 옆? 건물에 위치한
동티모르YMCA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머물며 언어와 현지 문화 교육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국제 NGO단체의 사업도 보고,
한국YMCA와 KOICA가 협력하여 세운 교육센터에서 아이들도 만날 것 같습니다.
남은 기간 자만하지 않고 함께 하는 시간이길 소원합니다.
계속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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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월요일, 지속가능한 농촌 발전을 위한 세미나가 딜리 꼬모로 지역 살라운 델따 노바에서 열렸다. 경제발전부장관 조아오 멘데스 곤잘베스의 주관으로 유럽연합의 후원을 받아 열린 자리다. 이번 워크숍의 주제는 동티모르에서 행해지고 있는 장기 농촌 개발 사업의 개요를 마무리 하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다. 워크숍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장기 계획 수립을 위한 전략적 농촌 개발안을 마무리 할 아이디어를 모아보자2. 농촌 개발을 위해 해야할 일들의 필요성과 우선순위와 재정 지원을 효율적으로 결합시키자. 참고로 재정은 중단기적 프로젝트를 위해 유럽연합에서 주로 후원하고 있다.3. 책임감 있는 대행사와 파트너로서 상호 보완하며 일하자
발제는 조세 라모스 호르타 대통령과 부총리, 경제발전부 장관, 재정부장관, 농업수산토목부 보좌관, 유럽 연합 대사 등이 했다. 국내외서 모인 고급 전문가들이 지속가능한 농촌 발전을 위해 각자의 의견과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둘째날에는 4가지 주제에 대해 그룹토론이 벌어졌다. 1. 지속가능한 농작물 생산, 식량안보, 빈곤절감2. 농업비지니스와 소액금융3. 사회 기간 시설 구축4. 천연자원과 환경이번 워크숍에서 기대되는 성과는 주제들에 대해 요약 보고서 및 권고 사항들이 나와 동티모르에서 중단기적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줄 거라는 것이다. 딜리위클리 4월 10일자에서 따옴정리 및 번역 아니나
베란다에서 열린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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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레 아이나로 초등학교 수업 환경은 열악하다. 건물 밖에서 수업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는 두 집의 베란다에서 수업이 열렸다. 마떼우스 데 제주스 총리는 수아이와 아이나로 지역 학교들의 상황을 둘러본 뒤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책상과 의자도 없이 베란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철퍼덕 땅바닥에 앉아서 공책을 펴 놓고 쓰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번 학기가 시작될 때부터 베란다에서 수업을 받아왔다. “아이나로에 가기 전, 수아이에 먼저 들렀다.” 마떼우스는 해당 장관에게 빨리 이 상황을 해결할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한 trimester가 이미 지나갔으나 학교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정부는 빨리 예산을 이 쪽에 배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회의를 열어 해당 장관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 공문에는 내가 이번 시찰에서 확인한 모든 문제점들이 적혀 있다.” 교육부 장관은 나중에 이 학교들에 책상과 의자를 사줄 예산으로 3백만 달러를 배정했다고 밝혔다. 딜리위클리 4월 10일자에서 따옴정리 및 번역 아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