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에세이, 이새암
99+
컴퓨터 앞에 앉아 라온아띠 5기 지원서를 쓰던 때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5개월을 뒤돌아보는 마지막 일기를 쓰고 있는 내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모든 일정 하나하나 자세하게 짚어보고 회상해볼 수는 없지만 큼직큼직하게 되돌아보려한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행동들을 시작하게 된 우리는 가장 먼저 현지어인 베트남어를 배운다. 더운 날씨와 주변 사람들에 적응할 시간조차 없이 현지어 배우기에 돌입했던 난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열정적인 코디와 다른 팀원들 덕분에 선의의 경쟁을 해가며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공부했던 것 같다. 5주 배워서 쓸 일 없을 것 같던 현지어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사항이 되었고 다른 생활과 활동들을 하면서 우리의 현지어는 점점 늘어갔다.
현지 적응시간을 갖고 난 뒤에 베트남 팀의 주된 활동인 홍안유치원 활동을 시작했다. 오고 가는 교통수단이 우릴 힘들게 했지만 갈 때마다 하얀 이빨 보이며 웃어주는 아이들 때문에 2달간의 유치원활동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렸다.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매일을 생활하며 언어와 문화, 그리고 나이를 넘어서 친구가 되었고 라온아띠가 되었다.
그 뒤에 있었던 워크캠프와 장애인학교, 장애인 체육대회 봉사, 그리고 베트남YMCA 워커들의 일 돕기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며 재미있게 보낸 듯하다. 적은 활동들을 꾸준히 하는 다른 팀들과는 다른 베트남 팀만의 특색인 다양한 활동을 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정말 많고 다양한 현지인들과 부딪히며 그들의 문화와 인생을 조금이나마 배운 것 같다. 5개월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지나와 보니 현지에 깊이 빠져들기엔 아쉬운 시간이었다. 이곳을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오는 것이라고 국내훈련 때 배웠다. 내가 흔적을 남겼을까? 하하... 하나 확실한 것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흔적을 남긴 것이다. 흔적이라기보다 는 추억, 나중에 꺼내보며 웃을 수 있는 좋은 추억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개인에세이, 곽경필
99+
라온아띠 5기 베트남팀 곽경필입니다.
이제 5개월의 활동이 거의 끝나고 이주일의 시간만 남아있는 지금 활동을 한번 되돌아보면 짧은 시간동안에 많은 시설을 방문하고 많은 행사에 참여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일까? 사람을 만나는데 있어서 어떨 때는 그냥 방관해 버리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너무나 짧은 인연이 아쉬울 때도 있고,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 나는 항상 만감이 교차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회를 갖는다. 한국에서도 해보기 힘든 경험들을 나는 베트남에서 참 많이 경험했다. 여기서 했던 모든 활동들이 나에게 모두 신선한 활동들이고, 두 번 다시 하기 힘든 활동들이 많았다. 그래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항상 언어라는 녀석을 나의 이런 마음가짐을 방해하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든 점도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잘 해온 것 같다.
여기서 활동을 할 때 마다 느끼는 점이 있다. 우리 라온아띠는 항상 베트남YMCA의 짐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무언가를 할 때 마다 우리 곁에는 코디네이터, 혹은 봉사자들이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사실 외국인 5명이 돌아다니는데 현지인 1명씩 함께하는 것이 맞지만 항상 드는 미안한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베트남에 있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매우 추상적이지만, 다수에게 받은 고마움을 다른 이에게 또다시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남은 2주 동안 나는 다행히, 운 좋게도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분명 큰 나눔은 아니지만,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 더 없이 좋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내 능력이 허락하는 한까지 일하고 싶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무언가를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앞의 4개월만큼이나 중요한 마지막 1개월이 되는 것 같다.
개인에세이, 윤무종
99+
활동을 마무리하며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딱 5개월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많은 것을 얻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든다면 유용한 기술을 배워 간다든가, 아주 큰 규모의 프로그램에 참여를 한다든가, 나의 바람이었던 꿈을 찾는다든가... 하지만 지금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얻었다거나 한 것 같지는 않다. 굳이 꼽자면 의식의 변화쯤이라고나 할까?
만약 라온아띠로 오지 못했다면 이 말레이시아라고 하는 매력적인 나라를 아주 늦게 알았을 것이다. 이 나라의 특징으로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까지. 거기다 뛰어난 관광 요충지이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이 나라의 번화가 한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내가 정말 아시아에 있는 것인지, 아니 과연 이곳이 내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가난한 동남아시아의 나라가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국내훈련에서 배웠듯이 국제활동이 꼭 힘든 일을 맡아하거나 못사는 사람들에게 퍼담아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오기 전에 살짝 흘려들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우리는 장애인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는데 이 이유는 기본적 사회 바탕이 어느 정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관심을 주변으로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였다. 내가 뭔가를 배워가자. 이 시간동안 뭔가를 받아가자.
긴 시간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왔다. 물론 일반적인 스태프들부터 청각장애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같은 봉사자들과 말레이시아의 일반적인 사람, 친구들. 덕분에 우습게도 눈에 띄게 얻어가는 것은 페이스북 친구목록이 많아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청각장애인들이다. 그들은 밝은 미소를 잃을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너무 착해서 바보 같다. 항상 우리가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내가 이 시간동안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점은 받은 만큼 주지 못한 것이다. 이들 덕분에,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배운 수화 때문에 나는 조금 더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관심이 가게 되었다. 아마도 돌아가게 된다면 이제는 한국 수화를 배워 보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서 정말로 내가 느낀 것은 별것 아니다. 이곳에서의 활동 중에 나 자신에게 가장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것은 부모님의 생신을 잊었던 것이다. 그냥 새로운 환경에 도착하고, 마냥 모든 것이 신기해서 한국에서의 것들은 모두 잊었던 것 같다. 생신을 잊은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연락도 너무 소홀했다. 덕분에 부모님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소홀함도 미안해졌다. 그리고 나를 응원해준 친구들과 지인들까지... 정말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잊고 있었다. 5개월간 새로운 친구를 많이 만났던 만큼 내가 머물렀던 그 자리,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 가장 중요한 나의 깨달음이었다.
만약 나의 주변사람이 해외로 나가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정말 계획을 정확히 세우고 가는 것이냐고. 그만큼 나의 허술한 5개월에 후회가 남긴 하다. 물론 더 넓은 세계로 나가서 안목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자신이 위치해 있는 그 자리에서 더 발전해 나가는 것도 아주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말레이시아에서 그 누구보다 서로 희노애락을 나누며 별탈없이 같이 생활했던 4명의 단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개인에세이, 문기
99+
말레이시아를 떠난다5개월간의 말레이시아 생활이 끝나가고 있다. 지금에 와서 자원 활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면접과 국내훈련 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지금도 자원 활동에 대한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나는 5개월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내 생각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처음에는 많은 것을 공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나만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곳에 와서 나의 무능력함을 다시 느꼈다. 영어와 말레이시아어를 못하는 나는 staff과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미술과 율동에 능통하지 못하고 번뜩이는 창의력과 아이디어도 없는 나는 프로그램 준비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컴퓨터를 못하는 나는 보고서 제작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함께 활동한 단원들에게 가장 미안하다. 또한 나를 뽑아준 한국 YMCA에 미안하다. 마지막으로 나로 인하여 탈락한 지원자들에게 미안하다. 나 말고 다른 지원자가 왔었다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를 지극히 아껴주시는 아이린 선생님, 수화선생님이자 동갑내기 친구인 샌디, PMY 유치원 선생님인 에스더 누나, 베다니홈 체육 선생님인 아즈미 형, 나에게 많은 힘과 용기가 되어준 베다니홈 학생들, 페낭 YMCA 수화 선생님이자 동갑내기 친구인 메이메이. 그리고 모든 staff와 봉사자들은 내가 말레이시아에서 받은 가장 큰 축복인 것 같다.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많은 장애인들과 함께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했다. 수화 선생님인 샌디, 메이메이, PMY 유치원 선생님인 에스더는 모두 청각장애인이다. 또한 베다니홈 체육선생님인 아즈미도 청각장애인이다. 나는 이들에게 수화 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을 배웠다. 베다니 홈 학생들은 모두 지적 장애인이다. 나는 이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고자했다. 하지만 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너무나도 행복했고, 많은 힘과 용기를 얻었다. 이것들은 내가 평생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페낭 YMCA에서는 청각장애인들과 함께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 소개 워크샵을 개최하고 청각장애인 학교를 방문해서 한국 문화를 소개하고 함께 한국 게임을 하고 한복을 입어보고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들은 모두 프로그램이 끝나면 한국 수화로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이들에게 진정한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 곧 말레이시아를 떠난다. 말레이시아에 있으면서 항상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었다. 왜냐하면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의 지친 삶을 탈피하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빨리 돌아가서 한국의 삶 속에서 나의 길을 찾고 싶다. 말레이시아에서 배운 많은 것들이 앞으로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개인에세이, 김지은
99+
김지은, 개인에세이 난 항상 내가 아는 것, 본 것이 다 옳고 맞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내가 보고싶은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했다. 말레이시아는 이런 날 180도 변화시켜놓았다.
물론 말레이시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남아시아의 자원봉사활동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라고 느낀다. 내가 라온아띠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 먼 곳에서 부족한 언어실력으로 대화를 하고, 수화로 deaf들과 친구가 되었을까? 이곳에서의 모든 생활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한편, 다시 나를 되돌아보게 하였다.
반송동.
아마 우리 팀원들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익숙할 테다. 그리고 사회복지나 지역운동, NGO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곳이다. 흔히 이곳을 빈곤지역이라고 부르며 마을공동체의 좋은 본보기인 곳이라고도 한다. 나는 이곳에서 엄마가 하는 지역운동들을 보며 자랐다. 그리고 반송동에 산다는 자체만으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무엇인가를 하는데 내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동안의 나는 그걸 장점으로 이용할 줄만 알았지 정말 장점이라 몸소 느끼진 못한 것 같다. 라온아띠를 통해 진정으로 내가 자란 반송이란 곳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복지.
난 이런 분야에 대해 배웠으니깐, 난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해봤으니깐, 난 이런 사람들을 만나봤으니깐, 난 사회복지를 공부하니깐……. 내가 더 잘알꺼야! 그렇지만 이건 틀린 것이었다. 3월의 나는 내가 제일 잘 알 것이라는 자만심에 모든 것을 내뜻대로 하길 원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여러 사람의 여러 생각으로 여러 의견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사회복지를 보면서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해야 할까? 학교에서 배운 것, 사회복지를 배우는 내가 느끼는 것, 사회복지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느끼는 것의 차이를 경험하는 것, 때로는 괴리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것이 너무 즐겁다!
언어.
중학교 때부터 수화를 배웠다. 물론 동아리활동이었지만 나름의 애착으로 대학에 와서도 농아인 협회를 다니며 계속 배워왔다. 그렇지만 청각장애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난 못하니깐 이라는 생각에 두려워만 졌고, 막상 대화를 해본적은 몇 번 없다. 요즘은 나 스스로에 깜짝 놀랄 때가있다. 한국수화보다 더 부족한 미국수화실력으로 이곳의 deaf들과 대화를 한다. 나 한국 가서도 할 수 있겠지? 영어도마찬가지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이곳은 영어또한공용어로 많이 쓰인다. 물론 바하사말라유를 배우긴 하지만 영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너무 싫어했었는데 부족한 언어능력 탓에 요즘은 영어와 바하사단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하기도 한다. 그런 내모습을 보면 얼마나 웃긴지.
긴장감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KL,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는 베다니홈, 유쾌하고 고마운 친구들이 있는 페낭! 나 너무 말레이시아에서 잘 생활하고 있는것 같아 기쁘다.
개인에세이, 한상우
99+
캄보디아에 온지 5개월째가 되던 날. 문득 3월의 내 모습이 궁금해 서랍을 뒤적거려 사진 한 장을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찍은 사진인데 지금과 비교해보면 많이 달라진 내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현지인처럼 검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어색한 미소가 아닌 밝게 웃는 내 모습, 이 2가지 변화가 3월과 7월 현재의 내 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에 있을 땐 뜨거운 햇볕아래에 있는 것 자체가 불행이라고 느꼈었는데 지금은 이 뜨거운 햇볕아래 있어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내 자신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곳 현실에 동화되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낯설고 거리감이 있었다면 5개월이 지난 현 시점의 나 자신은 프놈끄라움 마을에 살고 있는 마을주민이 아닐까 싶다. 아침마다 반갑게 맞아주는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아이들. 이 사람들이 있기에 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출국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매주 수업하러 다녔던 학교도 방학하게 되어 왠지 모르게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아쉽다는 느낌을 지금까지도 강하게 받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아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벌써 그리워서 그러는 지 정말로 모르겠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느낌들이 아이들을 더 못 잊게 만드는 게 아닐까? 라고 혼자 다짐하고 생각해본다.
캄보디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날 행복하게 해준 건 분명한 사실이다. 뭐라고 자세히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여기서 겪어본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캄보디아에 왔건만 내가 더 좋은 친구들을 얻었기에 뭔가 반대로 되어 버렸다. 현지 스텝, 유치원, 중학교 아이들과 나이는 다르지만 함께 지내오면서 주고받았던 마음들을 통해 우리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자신이 조급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다. 이렇게 허둥지둥하다 소중한 것을 놓칠까봐 겁도 나지만, 5개월이라는 시간동안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이 있기에 두렵지 않다.
마지막으로...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몇 바퀴 돌고 돌아 다시 여기서 보낸 추억들을 만난다면 캄보디아가 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는 뒤늦은 고백을 숨길 수 없을 것 같다.”
개인에세이, 이정석
99+
이전의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충실함도 내일의 나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였었다. 하지만, 내가 라온아띠가 되고, 현재, 이곳 캄보디아에 있는 5개월 동안 라온아띠는 내게, 인생에 있어서 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게 만들고., 이곳에서 다른 이들과 “어떻게” 살지에 집중하며, 다같이 잘사는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게 살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야 하는 삶을 살게 해주었다.
“다양성의 일치”
모든 사람은 다르다. 사람이 다르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법이다. 그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며 산다는 것은 나를 잘 아는 가족간에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며 같은 것이라고는 아시아 사람이란 것 외에 다양성의 극치인 이곳 캄보디아에 와서 캄보디아사람들과 그리고 한국스텝들과 일치를 이루며 산다는 것은 내가 아무리 사교성이 좋다고 해도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잘 살기위해선 무엇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제 국외활동을 마무리해야하는 시점에서 나는 한가지 답을 내릴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음을 찾아가며 사는 것이었다. 같은게 없다면? 닮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닮아가는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같이 어울려 살다보면 자연스레 되는 것이었다. 향수병을 싼 종이에 향기가 배이듯이 말이다. 물론, 처음엔 내가 그들의 다름을 잘 알지 못해 실수를 할 때가 많았다. 때론, 그 다름이 너무도 커 서로 충돌하는 일도 있었고, 감정이 상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그들과 나의 다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내 다름을 그들의 다름에 맞출 수 있게 되면서 어느새 나는 그들과 닮아져 가고 있었다.
타인을 내식대로 바라보는게 아니라 다양성! 삶의 모든 형태의 가치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다른 부분은 그 사람과 닮아가고 그 사람도 나에게 닮아 가면 되는 것이었다. 다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다르기 때문에 나와 그들이 어울릴 수가 있었다.
이곳 캄보디아에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직접 부딪혀 보고 느껴보고 경험해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고, 또한 다른 이들을 같은 문제를 바라보며 수많은 생각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요즈음, 새끼손가락부터 피며 숫자를 세고, 빨리빨리 보단 천천히를 외치는 내 자신을 문득 발견하며 놀라게 된다. 또한, 내 주변의 아이들이 나에게 한국말로 말하면 나는 캄보디아말로 대답하는 상황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어느새 나도 그들도 서로 닮아져 있음을 실감한다.
싫지 않다.
오히려 이 닮음을 오래토록 간직하며 나와 다름을 공유한 이들을 기억하고 싶다.
개인에세이, 이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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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사랑하는 내 꼬마친구, 피읍에게.
안녕, 피읍!
우리가 만난지도 이제 다섯달이 다 되어 가는구나.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정리하면서, 문득 너한테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 그 동안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이니까, 너와 함께한 추억만으로도 내 다섯달은 꽉 차서 든든하거든.
3월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 도서관 2층에서 한창 수업준비를 하고 있을 때, 넌 그런 우리가 신기한 듯 늘 주변을 서성대고 있었지. 우리말의 ‘ㅍ’ 발음과 똑같은 네 이름은 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특히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었어. 우리 둘이 친해지게 된 건 니가 알려준 ‘미은 엇미은(있다 없다)’ 놀이를 같이 하면서부터였을거야. 그 당시 가장 자신있게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정도가 거의 전부였던 내게, 나뭇잎을 양 손에 쥐고 어느 손에 있는지 맞추는 그 놀이는 다른 아이들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됐었지.
내가 이 곳에 오기 전에 면접에서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만약 에이즈에 걸린 아이를 만나게 된다면 그래도 그 아이를 안아줄 수 있겠나?’였어. 물론 에이즈가 그런 접촉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는걸 잘 알기 때문에 그 때 난 안아줄 수 있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그 상황을 직접적으로 마주한 적은 없어서 실제로는 어떨지 잘 알지 못했었어. 그러던 중에 우연히 아동결연 관련 서류를 보다가 니가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이미 너와 음식을 많이 나눠 먹었고 너를 많이 안았지만, 그게 전혀 더럽다거나 걱정된다거나 하진 않더라. 아마 여덟살인 니가 보균자라는건 모자 감염일 가능성이 크겠지. 어찌됐건 너로 인해 에이즈에 대한 막연한 편견도 깰 수 있었어.
한번은 유치원 수업을 가는데 너도 따라가고 싶다고 말한적이 있었잖아. 이 곳 유치원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어려운 형편이고, 때문에 이들 역시 지금 유치원에 다닌다고 해서 교육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어. 하지만 너처럼 생계가 급급해 그런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는걸 그제서야 알았어. 매일 너와 몇몇 아이들이 함께 하고 있는 색칠공부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시작하게 된거야.
피읍! 넌 내가 캄보디아에 있던 다섯 달 동안, 나를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해준 ‘수호천사’였다는거, 알지 모르겠다. 어느 날 센터에 도착했을 때,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 손을 잡아끌고는 가방 안에서 선물상자를 꺼내줬었잖아.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니가 그림공부한 종이들과 연필, 과자, 어디서 났는지 예쁜 머리핀까지 들어있었지. 그 날은 기분이 좋아서 평소보다 더 싱글벙글이었어. 오죽하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자랑하고 다녔다니까! 또 5월이었나? 유독 그 날따라 지치고 힘들어서 혼자 의자에 앉아있는데, 니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하늘이 예쁘다고 좀 보라고 했었잖아. 맑은 하늘엔 아주 크고 동그란 모양의 예쁜 무지개가 떠 있었고, 그걸 보는 순간 정말 거짓말같이 기분이 좋아졌어. 내가 여태껏 본 무지개중에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였거든. 얼마 전에 니가 접어준 별과 하트를 받고는 하나하나 접었을 생각에 고마워서 눈물이 나더라. 나에게 무언가를 주어서가 아니라, 너 자신에게도 소중한 것들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참 고마워.
피읍. 너를 통해 캄보디아를 알았고, 이해했고, 더 사랑할 수 있었어.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이 자꾸만 아쉬워지는 이유도 아마 너를 비롯해 다섯달동안 아낌없이 사랑했던, 많은 꼬마친구들 때문일거야. 내 삶의 모토도 그렇고 이 곳 캄보디아에 오기 전 했던 다짐도 마찬가지인데, 난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 ‘단 한사람이라도’ 더 행복해지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니가 나를 만나 행복했다면, 그럼 그것만으로 내 다섯달은 충분히 만족스럽고 감사해.
춤을 좋아해서 음악이 나오면 몇 시간이고 힘든줄 모르고 춤추는 너. 댄서가 되고 싶다는 꿈이 꼭 이뤄지길 응원할게. 다음에 니가 커서, 지금 타고 다니는 큰 자전거가 꼭 맞을 나이가 되면, 나 뒤에 태워주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그러려면 건강하게 쑥쑥 잘 커야한다!
안녕.
개인에세이, 여세린
99+
캄보디아에서의 151일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처음엔 길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지만 지나고 보니 정말 순식간이었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꿈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서 참 많이 웃고 뛰어다니며 정말 말 그대로 내 생애 가장 뜨거운 날들을 보냈다.
나는 원래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편이다. 날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날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항상 그들에게 보여지는 나를 만드느라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는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신경쓰지 않고 내 생애에서 가장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아마 날 보면 항상 웃어주는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의 태도나 겉모습보다는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나를 친구로 생각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나 역시도 나에게 웃어주는 사람들이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금세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경계하지 않으며 가깝게 다가오는 이 사람들 덕분에 항상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심으로 꽉 차 있던 나도 더 자유롭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처음 지원서를 내고, 면접을 볼 때, 지원동기에 대한 물음에 ‘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 말을 할 때에는 내 현실을 떠나서 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웃어주고 힘이 되어주면 그들도 나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나는 분명 행복하다. 하지만 처음 생각했던 이유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반겨주고 내게 웃어주는 아이들 덕분에 내가 행복해졌다. 내가 해준 것이 없는데도 나를 좋은 사람이라 해주고 나에게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 스스로 정말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여기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나에게 달려오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고 함께 뛰어다니고 하이파이브를 해주는 것이 전부이다. 아이들은 내가 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준다는 말을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써왔지만 이곳에서는 마음으로 그 말에 절절히 공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에서 나에게 달려오는 아이들을 많이도 안아주고 업어주고 함께 뛰어다녔다. 많이 뛰어다니고 많이 안아줄수록 내 몸이 곧 쓰러지겠구나, 곧 죽겠구나 싶었지만 의외로 나는 굉장히 튼튼했고 아프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행복한 마음으로 꽉 차게 되었다.
이런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한 이곳에서 떠난다는 생각이 너무 무서워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내가 며칠 후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5개월은 정말 작은 기간이지만 이 5개월이 앞으로 나에게 있어서는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런 5개월을 보내고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가서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여기에서처럼 꿈과 같이 행복함으로 가득차서 살아가는 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5개월의 끝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돌아가서의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에서 배우고 느낀 부분들을 바탕으로 이전보다는 나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엄청 많이 변해서 책에서 나오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된다거나 지금까지의 나를 버리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작은 부분 부분에서 이전보다는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오면서 인정하기 싫었던 부분, 몰랐던 부분들을 이곳에서 느끼고 알게 되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기 때문에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는 이전보다는 조금 나아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내가 기대된다.